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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비극론』 (1. 고통의 가치)2020.11.23
『우리 시대의 비극론』 (1. 고통의 가치)
2. 고통의 가치 中
비극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엘리자베스조와 제임스조의 비극의 결말 부분─사람들의 삶이 복구되고 맬컴이나 포틴브라스와 같은 인물이 무대를 행진하는─에 대해서 현대인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냉소적인 시대에 자란 우리는 이런 장면들이 그저 피상적인 제스처일 뿐이거나 아니면 이데올로기적인 필요에 의한 것, 연극적인 청소 행위, 허구적인 위무책이라 여긴다. 이와 달리 전형적인 모더니즘 텍스트는 독자를 위안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끝난다. 그러나 윌리엄즈가 지적하듯 "해결책이 없다는 결론 역시 하나의 답변이다." (70)
"비극적 행위는 대개 주인공을 통해서 일어난다." 삶이 갱신되고 공통의 의미들이 복원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꼭 연극의 끝에 모든 것이 회복되는 장면을 넣을 필요는 없다. (70-71)
윌리엄즈는 비극이 행위 전체라고 주장한다. 현대의 침울한 감수성을 사로잡는 일부 추상적인 행위가 비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71)
한편 이 세계의 무의미함에서 가치를 찾으려 하는 알베르 카뮈와 같은 비극적 사상가들도 있다. ... 카뮈에게 반항은 부조리한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화해하지 않은 채 도전적으로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반항은 전통적인 비극관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전복' (subversion)의 초기 형태다. 확고한 거부는 체제를 파괴시키거나 붕괴시키지는 못해도 최소한 저항은 가능하게 한다. 자살은 이와는 달리 필연에 투항하는 것이다. (76)
비극이 인간의 가장 심오한 가치를 드러낸다면 당연히 그것이 인간의 실존에 필수적임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우리는 결국 우리의 궁극적 무능력을 하릴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79)
헤겔이 미학 강의에서 지적하듯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관적 자의식과 객관적 상황을 나누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주관적으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자신을 변호하는 경우도 한 번도 없는데, 이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게 근친상간을 하고 부친을 살해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구제의 사유가 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러나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그는 신들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무지를 근거로 결백을 주장한다. (81)
에드가의 진의는 "우리가 아직 말을 할 수 있다면 최악은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고통이 너무도 엄청나서 말을 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라는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82)
고통은 당연히 존엄성, 용기, 인내와 같은 훌륭한 가치를 환기하지만, 그러나 이런 가치를 연습할 수 있는 더 쉬운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놀랍게도 비극 연구자들 중 누구도 이 단순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83)
그[예수]의 죽음은 희생이다. 희생은 무가치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84)
죽음과 대결하는 가운데 사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견해에는 사 줄 부분이 적지 않다. 우리가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삶을 무난히 살아갈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될 것이다. ... 죽음은 삶을 사육제적으로 상대화하여 우리의 신경증적 집착을 풀어 주고 그것을 더 깊게 즐기도록 해 준다. 이러한 초연함은 무관심의 반대이다. (85-86)
예수의 죽음이 효과적인 것은 그것이 그 자신에게도 일종의 막다른 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난감해 하며 이 대목을 생략하는데, 이는 분명 신과 같은 존재가 절망하는 것은 어색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도구로 최악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희망이 생긴다. 최악을 인간 상황에 대한 최종적 표현으로 받아들일 때만 그것은 최종적 표현이기를 멈추게 된다. (88)
인간이 빈곤을 완전히 떨치려면 삶을 부인하거나, 혹은 대충 때우거나, 혹은 지레 망쳐버려서는 안된다. 무의미와 절망의 지옥으로 끝까지 내려가서 철저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속죄양은 사도 바울의 구절대로 "죄악이 되어야만," 즉 버림받은 비인간성의 기괴한 상징이 되어야만, 자신의 상황을 넘어서 다른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 (88)
예수가 죽기를 주저하는 인간적 면모를 보이는 것은 코르네유의 폴리왹트와 같은 인물과 대조된다. 폴리왹트는 ... 세계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갈망하고," 순교자로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기를 열렬히 바란다. ... 진정한 순교자라면 그처럼 분별없는 욕망을 갖지 않는 법이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세계를 포기하는 데 무슨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88-89)
조지 스타이너처럼 기독교가 본질상 반-비극적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삶이 변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찰스 테일러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범한 것이 소중하다는 믿음을 만들어 내었다. 이는 비극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비극은 경험 세계를 경멸하는 플라톤주의에도 반대하지만, 경험 세계가 지금 이대로도 훌륭하다고 보는 실용주의에도 반대한다. ...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모두 비극적인 것을 구제하려 하는데, 구제 작업을 위해서는 비극의 핵심에 뛰어들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사회에 대한 단순한 유토피아적 대안이 아니라 내재적 비판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지 않다면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현재의 모든 장애와 절망을 포함한 바로 이 상황을 교정할 수 없을 것이다. (90-92)
현대에는 비관보다는 낙관이 더 큰 죄로 간주되는 것 같다. ... 미숙한 종말론의 외침보다 희망이 후기 현대를 더 당혹스럽게 한다. 물론 섣부른 희망이 고통스런 현실을 배반할 때는 희망을 경계해 마땅하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사회적 진보의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희망을 싫어하고, 자유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현재에 대단히 잘못된 무언가가 존재함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희망을 경멸한다. 보수주의자들보다 더 우울한 비극이 있는가 하면, 진보주의자들보다 더 희망적인 비극도 있다. 이 두 관점들의 뿌리는 결국 같다. (93)